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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0일 금요일

에녹의 믿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에녹의 믿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 본문: 창세기 5:21-24 / 히브리서 11:5-6 / 유다서 1:14-15

서론: 믿음은 특별한 순간보다 매일의 걸음에서 드러납니다

성경에는 큰 사건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로 기억되고, 아브라함은 떠남으로 기억되며, 모세는 출애굽으로 기억됩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선 믿음으로 기억되고, 엘리야는 갈멜산의 불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에녹은 그런 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을 한 사람도 아니고, 나라를 세운 사람도 아니며, 큰 기적을 행한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은 그의 생애를 매우 짧게 기록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짧은 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에녹의 인생은 많은 업적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특별한 순간의 결단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큰 시험 앞에서 믿음을 보이고, 위기 앞에서 기도하고, 특별한 예배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녹을 통해 보여 주는 믿음은 조금 다릅니다. 에녹의 믿음은 사건보다 걸음에 가깝습니다. 한 번의 감동보다 오래 지속된 방향에 가깝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어느 날 크게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매일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중심은 이것입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매일의 삶을 그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는 동행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장차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1. 에녹은 죽음의 계보 한가운데서 생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입니다. 이 장은 반복되는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누가 몇 세에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고, 그리고 죽었더라. 이 구조가 계속 반복됩니다. “죽었더라.” 이 말은 창세기 5장의 무거운 종소리와 같습니다. 아담의 죄 이후, 인간의 역사는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낳고 살고 수고하고 결국 죽습니다. 창세기 5장은 인간 문명의 발전보다 먼저 인간 실존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계보 한가운데 에녹이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반복되던 “죽었더라”라는 표현이 에녹에게서는 멈춥니다. 성경은 에녹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죽음의 반복 속에서 에녹은 생명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에녹의 믿음이 가진 첫 번째 의미입니다. 믿음은 죽음의 시대 속에서 생명의 하나님과 걷는 것입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도 죄가 깊어지는 시대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의 후손들이 문명을 발전시키지만, 동시에 폭력과 교만도 함께 자라납니다. 라멕은 자기 폭력을 자랑하며 복수를 노래합니다. 사람의 재능은 커졌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작아졌습니다. 문화는 발전했지만, 영혼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런 시대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도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낳고, 딸을 낳고, 가정을 이루고, 일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방향은 세상과 달랐습니다. 그는 죄가 깊어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모두가 자기 길을 갈 때, 그는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을 택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도 에녹의 시대와 닮아 있습니다. 기술은 발전하고, 정보는 넘치며, 사람의 욕망은 점점 더 정교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여전히 두렵고 외롭고 교만하며,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의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세상을 저주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믿음은 시대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걷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동행하다”는 말은 함께 걷는다는 뜻입니다. 함께 걷는 사람은 방향을 맞춥니다. 속도를 맞춥니다. 대화를 나눕니다. 혼자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가지 않습니다. 동행은 관계입니다. 동행은 친밀함입니다. 동행은 지속적인 교제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그가 단지 종교적 의식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삶의 한 부분으로만 모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필요할 때만 찾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앞에서 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삶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사람은 자기 앞에서 삽니다. 사람들 앞에서 삽니다. 평가 앞에서 삽니다. 욕망 앞에서 삽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코람 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일상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동행은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자녀를 기르는 자리에서도, 일을 하는 자리에서도, 말을 주고받는 자리에서도, 외로운 밤에도, 아무도 보지 않는 선택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에녹의 믿음은 바로 그 일상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식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특별한 은혜의 순간만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깊이는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사람을 만나고, 같은 문제를 감당하고, 같은 약함과 싸우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동행입니다. 작은 말 한마디를 하나님 앞에서 조심하는 것, 분노가 올라올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욕심이 마음을 흔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길을 묻는 것, 그것이 동행입니다.

에녹은 거대한 업적보다 더 어려운 일을 했습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과 걸었습니다. 한순간 불타오르는 신앙보다 어려운 것은 오래 꺼지지 않는 신앙입니다. 큰 소리로 고백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조용히 매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은 바로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3.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에녹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삶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착하게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곧바로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근거는 믿음입니다. 도덕적 성실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 열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두 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나의 삶을 보시고, 나의 걸음을 아시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보다 더 실제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보이는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합니까? 우리의 업적입니까? 우리의 지식입니까? 우리의 봉사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순종과 헌신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뿌리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 없는 봉사는 자기 과시가 될 수 있고, 믿음 없는 예배는 형식이 될 수 있으며, 믿음 없는 지식은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에녹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사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사는가?” 이 질문은 매우 깊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삶은 늘 불안합니다. 사람의 평가는 변하고, 사람의 인정은 오래가지 않으며, 사람의 시선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은 단순해집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한 방향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가, 하나님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인가, 이것이 믿음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4. 에녹의 동행은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삶이었습니다

유다서는 에녹에 대해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에녹은 단지 조용히 경건하게 산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경건하지 않은 세대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서 14-15절은 에녹이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행위와 말에 대해 주께서 심판하실 것을 예언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결코 세상과 무관한 내면적 경건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동행은 세상의 죄를 분별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걷는 사람은 세상의 어둠을 더 선명하게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사람은 시대의 불의 앞에서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녹의 예언은 분노의 배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거룩한 증언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미워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의로 세상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경고했습니다.

오늘 성도에게도 이 예언자적 삶이 필요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강단에서 예언자처럼 외쳐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삶 자체로 세상에 말을 겁니다. 정직한 선택으로, 깨끗한 양심으로, 절제된 언어로, 약자를 향한 긍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합니다.

믿음은 세상과 똑같이 살면서 마음속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삶의 방향으로 드러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걸었다는 것은 그가 세상과 같은 방향으로 걷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동행은 선택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기 위해서는 어떤 길은 거절해야 합니다. 어떤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욕망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떤 관계와 문화와 습관은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조용하지만 강합니다. 세상은 큰 소리를 내는 사람만을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을 강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시대의 흐름보다 더 깊은 흐름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은 동행한 에녹을 자기에게로 데려가셨습니다

창세기 5장의 가장 놀라운 표현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히브리서는 이것을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해석합니다. 에녹은 죽음의 계보 속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동시에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질 최종 소망을 미리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에녹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행의 끝에서 하나님은 그를 자기 곁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복음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마지막은 허무가 아닙니다.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믿음의 길은 결국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현실 아래 살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의 “죽었더라”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사건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질 부활의 소망을 미리 비추는 등불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것이 성도의 궁극적 소망입니다. 우리는 단지 오래 사는 것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소망합니다. 천국의 본질은 장소의 화려함보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동행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시작한 동행이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완전한 교제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과 걷는 길은 헛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역사가 길게 기록하지 않아도, 세상이 크게 주목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동행한 사람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 걸음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데려가십니다.

결론: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걸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녹의 믿음은 요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 한 문장이 그의 인생을 설명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은 무엇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까? 성공입니까? 분주함입니까? 상처입니까? 욕망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까?

믿음은 특별한 장소에만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늘의 걸음 안에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일터에서 정직을 선택하는 것, 말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살피는 것,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을 때 그것을 다스리려 하는 것, 낙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 이것이 에녹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내 속도를 맞추는 것입니다. 내 욕망의 길에 하나님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내 걸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행에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절제가 필요합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에녹보다 더 분명한 길이 있습니다. 에녹은 약속의 그림자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성령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동행은 자기 힘으로 경건을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를 따라 걷는 삶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더 빠른 길, 더 넓은 길, 더 편한 길, 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묻습니다. “이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우리의 선택을 바꾸고, 우리의 언어를 바꾸고, 우리의 관계를 바꾸고, 우리의 하루를 바꿉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다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크고 화려한 업적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동행을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시대 속에서도 생명의 하나님과 걷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의 생애가 끝나는 날, 우리의 이름 옆에도 이런 고백이 남기를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주님과 함께 걷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벨의 믿음, 피로 말하는 예배

아벨의 믿음, 피로 말하는 예배

  • 본문: 창세기 4:1-10 / 히브리서 11:4 / 히브리서 12:24

서론: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아벨은 긴 생애를 남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왕도 아니었고, 선지자도 아니었으며, 위대한 업적을 세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등장한 뒤 그는 곧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삶은 짧고, 그의 말은 성경에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은 그를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웁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아벨의 위대함은 오래 산 데 있지 않았습니다. 많은 일을 한 데 있지도 않았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께 드린 예배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벨을 통해 예배의 본질을 생각하려 합니다. 예배는 단순히 종교적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방식입니다. 예배는 내가 누구를 의지하는지,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아벨의 믿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참된 믿음은 자기 의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은혜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완성됩니다.

1.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에서 드러났습니다

창세기 4장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밖에서 낳은 두 아들을 소개합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예배자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까?

단순히 제물의 종류 때문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구약 율법 안에는 곡식 제사도 있습니다. 땅의 소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제물의 외형만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과 믿음입니다. 히브리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즉 하나님께서 주목하신 것은 단지 제물이 아니라 그 제물 안에 담긴 믿음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방식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첫 새끼”는 가장 먼저 얻은 것, 곧 가장 귀한 것을 의미합니다. “기름”은 생명과 풍성함의 상징입니다. 아벨은 남은 것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덜 중요한 것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렸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예배의 우선순위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남은 시간, 남은 마음, 남은 정성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삶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모십니다. 아벨의 제사는 그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겼음을 보여 줍니다.

2. 아벨의 제사는 피 흘림의 의미를 품고 있었습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양의 첫 새끼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목축민의 직업적 산물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흐름 속에서 보면, 아벨의 제사는 피 흘림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인간의 수치를 덮기 위해 생명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은 양을 드립니다.

물론 창세기 4장은 아직 레위기 제사 제도가 주어지기 전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 아벨의 제사는 장차 나타날 속죄의 원리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자기 의로 열리지 않습니다. 죄인은 생명의 대속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거절된 이유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자기 손의 수고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물론 땅의 소산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마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다는 고백,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사는 피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생명의 희생을 앞세웠습니다. 이것은 예배의 깊은 본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예배는 인간의 성취를 자랑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올 때 우리의 공로를 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일, 이룬 일, 지킨 일, 쌓은 업적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예배는 인간의 감정 행사가 될 수 있고, 십자가 없는 경건은 자기 의의 장식이 될 수 있습니다.

3. 가인의 분노는 믿음 없는 예배의 민낯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인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노했습니다.

믿음 없는 예배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제물을 드렸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종교 행위는 있으나 회개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반응하지 않으시면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형제를 미워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경고이자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즉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죄가 문 앞에 웅크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들로 아벨을 불러내어 죽였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시작된 문제가 형제 살해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잘못된 예배는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 없는 예배는 결국 이웃을 향한 미움과 폭력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바르게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은 형제 앞에서도 자기 의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형제 앞에서도 긍휼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배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배의 실패는 관계의 실패로 이어지고, 하나님 앞에서의 왜곡은 사람 앞에서의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4. 아벨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아직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에 대해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인의 폭력 앞에서 끊어졌습니다. 그는 억울하게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지금도 말한다고.

무엇을 말합니까? 아벨은 우리에게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말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삶이 참 예배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의가 아니라 피 흘림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의인의 피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잊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사람은 아벨의 죽음을 묻어 버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피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때로 세상에서 손해를 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언제나 즉각적인 승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그 믿음 때문에 형의 미움을 받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증언하셨습니다. 세상이 믿음의 사람을 침묵시켜도 하나님은 그 믿음을 말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오늘의 성도에게 큰 위로입니다. 우리의 작은 순종, 우리의 눈물의 예배, 우리의 보이지 않는 헌신, 우리의 억울한 고난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믿음으로 드린 예배는 땅에 묻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여전히 말합니다.

5.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이야기는 아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켜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라고 합니다. 아벨의 피도 말합니다. 그의 피는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의 피는 죄의 폭력을 고발합니다. 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는 더 나은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단지 억울함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용서를 말합니다. 화목을 말합니다. 속죄를 말합니다. 새 언약을 말합니다. 아벨의 피는 가인의 죄를 고발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을 용서하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움입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자기 의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안색이 변하고,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음에도 그것을 다스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아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벨의 모범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아벨이십니다. 죄 없이 의로우셨으나 악한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단지 억울한 순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양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친히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아벨은 피 흘림의 예배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해집니다. 우리는 아벨처럼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아벨의 제사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정성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벨의 믿음은 예배의 믿음입니다. 그는 오래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예배가 말합니다. 그는 많은 업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믿음이 말합니다. 그는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증언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고 있습니까? 가인처럼 자기 손의 수고와 자기 의를 붙들고 나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의 형식은 있으나 회개가 없고, 제물은 있으나 믿음이 없고, 종교 행위는 있으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사라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화려한 예배가 아니라 믿음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자기 의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성취로 열리지 않고, 오직 피 흘림의 은혜로 열립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 길을 그림자로 보여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길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듭니다. 우리의 정결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듭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듭니다.

아벨의 믿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나는 내 의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나는 내 공로로 서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믿음의 제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헌신이 남은 것을 드리는 습관이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 우리의 믿음이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길이라 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피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린 예배를 기억하십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세상은 침묵시켜도 하나님은 말하게 하십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아직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합니다. 그 피는 우리에게 용서를 말하고, 생명을 말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그 피 위에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 은혜 안에서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담의 믿음, 실패한 자리에서 약속을 붙들다

 

아담의 믿음, 실패한 자리에서 약속을 붙들다

  • 본문: 창세기 3:15, 20-21 / 로마서 5:17-19 / 고린도전서 15:45

서론: 믿음은 완벽한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의 사람을 생각할 때, 흔들림 없는 사람, 실수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믿음의 사람들은 대체로 상처가 있고, 실수가 있고, 두려움이 있으며,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진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완벽한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낸 종교적 능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무너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붙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는 인물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성경의 첫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류의 타락을 가져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담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죄, 불순종, 실패, 죽음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아담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서 믿음을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담은 믿음의 사람입니까?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명단에 아담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을 자세히 보면, 아담의 생애 안에는 믿음의 씨앗이라 부를 만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아담에게 약속을 주셨고, 아담은 그 약속의 빛 아래에서 다시 삶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중심은 이것입니다. 아담의 믿음은 실패 이전의 순결한 믿음이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1. 아담의 실패는 믿음의 반대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아담의 이야기를 믿음의 관점에서 읽으려면 먼저 그의 실패를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여자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의 유혹은 단순히 금지된 열매를 먹으라는 유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드는 유혹이었습니다. 더 깊이 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유혹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다른 음성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는 단순한 식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선택의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을 따를 것인가.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지 않았고, 여자를 탓했으며, 더 깊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를 원망하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말 안에는 죄인의 오래된 습성이 들어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책임을 밖으로 돌립니다. 죄인은 자기 죄를 인정하기보다 누군가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끝내는 하나님을 탓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인간의 실패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실패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질문은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숨은 인간을 찾아오시는 은혜의 음성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 부르심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2. 하나님은 심판의 자리에서 복음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은 심판의 장입니다. 뱀에게 심판이 선포되고, 여자에게 고통이 선포되고, 남자에게 수고와 죽음이 선포됩니다. 땅은 저주를 받고, 인간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이 선언됩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장 한가운데 놀라운 말씀이 빛처럼 놓여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교회는 오래전부터 이 말씀을 원복음, 곧 최초의 복음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아직 율법도 없고, 성전도 없고, 제사 제도도 없고, 선지자도 없던 때에 하나님은 이미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심판만이 아니라 구속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계획을 폐기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언약적 긍휼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에덴을 잃었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남겨 두셨습니다. 인간은 생명나무에서 멀어졌지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다시 생명의 길을 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내가 아직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안에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죄와 심판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담의 믿음은 바로 이 약속 앞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이제 죄 없는 동산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땀 흘려야 하는 땅의 사람이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들은 사람입니다.

성도의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완전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너졌기 때문에 믿습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듭니다. 믿음은 인간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어 사는 가난한 영혼의 호흡입니다.

3. 아담은 죽음의 선고 앞에서 생명을 말했습니다

창세기 3장 20절은 짧지만 깊은 말씀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이름이 붙여진 시점입니다. 이 이름은 에덴의 평화로운 순간에 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죄가 드러나고, 심판이 선포되고, 죽음이 선언된 이후에 붙여졌습니다.

아담은 죽음의 선고를 들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은 인간 실존의 가장 무거운 선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독립적인 생명을 얻으려 했지만, 결국 자신이 흙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하와, 곧 생명이라 부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작명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담은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에덴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희미한 빛 아래에서 아내를 “생명”이라 부릅니다. 죽음이 현실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생명의 가능성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모르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믿음은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실패가 없었다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남아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죽음의 언어가 많습니다. 끝났다는 말, 늦었다는 말, 소망이 없다는 말,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말이 우리 마음을 누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절망의 문장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아담이 죽음의 땅에서 하와를 생명이라 불렀듯이, 성도는 무너진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실 생명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4. 하나님은 무화과나무 잎이 아니라 가죽옷으로 덮으셨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인간은 죄를 지은 후 자기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책과 수치를 스스로 처리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죄인은 언제나 자기 방식으로 자신을 가리려 합니다. 변명으로 가리고, 업적으로 가리고, 종교적 행위로 가리고, 남보다 낫다는 비교의식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이 만든 덮개는 죄의 깊이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수치를 잠시 숨길 수는 있어도 죄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은 은혜의 표지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벌하시지만 동시에 덮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죄인을 완전히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여기에는 장차 성경 전체에 흐르게 될 제사와 속죄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죄인의 수치를 덮기 위해 생명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수치를 담당하시고, 자기 의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우리를 입히셨습니다.

아담의 믿음은 이 은혜를 입는 믿음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씻지 못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에덴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옷을 입었습니다. 믿음은 결국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무화과나무 잎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자기 의의 무화과나무 잎을 엮으려 합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남들보다 낫다. 나는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인정하실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만든 옷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오직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은혜의 옷,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설 수 있다고.

5. 첫 아담의 실패는 마지막 아담 안에서 회복됩니다

아담의 믿음을 설교할 때 반드시 마지막에 도달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첫 사람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지만,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바울은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합니다.

아담은 인류의 머리로서 실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죄와 죽음을 세상에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습니다. 첫 아담이 동산에서 불순종했다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순종하셨습니다. 첫 아담은 “내 뜻대로”의 길을 갔지만, 마지막 아담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첫 아담은 나무의 열매를 취함으로 죄를 가져왔지만, 마지막 아담은 나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이야기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담의 실패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죽음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받았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실패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합니다. 아담은 실패한 첫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한 인간을 대신하여 순종하신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첫 아담에게 있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결론: 실패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의 믿음은 찬란한 승리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패 이후의 믿음입니다. 죄를 지은 뒤, 수치를 알게 된 뒤, 에덴 밖으로 나가야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믿음은 우리에게 가깝습니다. 우리는 아담을 너무 잘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아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다른 음성을 더 믿는 아담, 책임을 회피하는 아담, 자기 손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수치를 가리려는 아담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아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실패한 자리까지 내려오셨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의 부끄러움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의의 옷으로 우리를 덮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실패했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무너졌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에덴을 잃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믿음은 완벽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증명서가 아닙니다. 믿음은 실패한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에 기대어 다시 일어서는 은혜의 손입니다. 아담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말했듯이, 우리도 절망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말해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옷을 입고 에덴 밖으로 나아갔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오늘의 땅을 걸어가야 합니다.

삶은 여전히 수고롭고, 땅은 여전히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인간을 찾아오셨고, 약속을 주셨으며, 마침내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되, 은혜를 더 크게 붙드는 사람입니다. 실패를 부정하지 않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의 무화과나무 잎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사람입니다.

아담의 믿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실패가 끝은 아니라고. 심판의 자리에도 약속은 들려온다고. 에덴 밖의 길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그리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잃어버린 생명은 다시 주어진다고.

오늘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약속을 붙드는 믿음, 수치의 자리에서 은혜의 옷을 입는 믿음,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하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도 주님 앞에 서고, 그 믿음으로 다시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월 넷째주 주일 오후 예배 대표기도문

8월 넷째주 주일 오후 예배 대표기도문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8월 넷째 주일 오후에도 주님의 백성들을 다시 예배의 자리로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무더웠던 여름이 서서히 끝자락을 향해 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생명과 가정과 교회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