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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8일 수요일

[신앙칼럼]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신비한 감정에 사로잡혀 사는 삶이 아닙니다. 또한 순간적인 열정이나 종교적 분위기에 의존하는 삶도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선택과 삶의 방향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시는 은혜의 삶입니다. 성도는 자기 힘으로 거룩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단순한 능력이나 영향력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이시며,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가르치시며 책망하시고 위로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로, 곁에 부름받아 돕고 변호하며 위로하는 분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령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라, 성도의 연약함 속으로 가까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로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행하라”는 말은 단순히 한 번의 결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삶의 걸음, 반복되는 선택, 일상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특별한 순간에만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말과 생각과 관계와 욕망 속에서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성은 예배당 안에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집에서의 말투, 일터에서의 정직,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은밀한 자리에서의 선택 속에서 드러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먼저 육체의 욕망과 싸우는 삶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는 단순히 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죄된 인간의 성향을 뜻합니다. 육체는 언제나 자기 만족을 원하고, 자기 의를 세우며, 자기 감정을 절대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데려가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교만은 꺾이고, 자기 사랑은 폭로되며, 죄를 가볍게 여기던 마음은 회개로 바뀝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단순히 죄를 억누르는 삶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성령의 열매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로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매”라는 표현입니다. 열매는 억지로 매다는 장식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맺히는 결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도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하실 때 나타나는 은혜의 증거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 갑니다. 성령의 사역은 성도를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께 집중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체험을 절대화하지 않으며, 사람을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높이고, 말씀을 사랑하게 하며, 교회를 세우고, 이웃을 섬기게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또한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말씀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기록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게 하시며,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은 충동과 다릅니다. 성령의 음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어떤 감동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말씀의 진리와 사랑의 질서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마음대로 사는 방종이 아닙니다. 성령 안의 자유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풀려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자유입니다. 이전에는 미움에 끌려갔지만 이제는 용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욕망에 지배되었지만 이제는 절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두려움에 묶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은 성도를 억압하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자유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날마다 자신을 성령께 내어 드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쉽게 흔들립니다. 기도하다가도 마음이 흩어지고, 말씀을 듣고도 오래지 않아 자기 방식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넘어지는 성도를 다시 일으키시고, 메마른 마음에 말씀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며, 죄를 깨닫게 하시고,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방향이 바뀐 사람입니다. 자기 뜻을 따라 살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리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당연하게 여기던 자리에서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화려한 체험보다 조용한 순종을 귀히 여기고, 큰 능력보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더 사모합니다.

오늘도 성도는 성령 안에서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말씀 앞에 붙드시고, 우리의 걸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시며, 우리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결국 내 안에 내가 왕이 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시는 삶입니다. 그 길에서 성도는 조금씩 낮아지고, 조금씩 새로워지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칼럼]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성도는 단지 세상의 끝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에서 오늘을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단순히 미래 어느 날 일어날 무서운 사건이 아닙니다.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 안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삶이란 현실을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 깊고 진지하게 살아내는 삶입니다.

신약성경은 성도를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히브리서 1장 2절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때가 단순히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옛 시대는 결정적으로 흔들렸고,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된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긴장입니다. 성도는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갑니다.

이 긴장은 성도의 삶을 세상과 다르게 만듭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지만, 성도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성공과 소유와 인정으로 인생을 평가하지만, 성도는 주님 앞에 설 날을 기억하며 오늘의 선택을 분별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빌 3:20). 이 말은 땅의 삶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의 시민답게 땅에서 책임 있게 살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일수록 땅에서의 삶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종말론적 삶은 먼저 깨어 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42). 깨어 있음은 날짜를 계산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잠들지 않는 삶입니다. 시대의 풍조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낮추는 삶입니다. 종말을 아는 사람은 오늘을 대충 살지 않습니다. 마지막을 아는 사람은 현재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습니다.

또한 종말론적 삶은 거룩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베드로는 만물이 풀어질 것을 말한 뒤에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묻습니다(벧후 3:11). 성경의 종말론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정보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진리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은 성도의 윤리를 세웁니다. 언젠가 모든 것이 드러날 날이 있다면, 우리는 은밀한 자리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날이 있다면, 우리는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종말론적 삶은 소망을 잃지 않는 삶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는 죄와 죽음과 불의가 얼마나 깊은지를 더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눈물과 죽음과 애통이 사라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합니다(계 21:1-4). 이 약속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미래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어둠을 보면서도 마지막 빛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성도는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손을 놓고 하늘만 바라보는 수동적 기다림이 아닙니다. 성도는 주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하며 기다립니다. 가정에서 사랑하고, 교회에서 섬기며, 일터에서 정직하고, 이웃의 아픔에 책임 있게 반응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은 오늘의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물으실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예측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는가입니다.

종말론적 삶은 결국 그리스도 중심의 삶입니다. 종말의 핵심은 사건이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우리의 소망은 어떤 징조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오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지막 고백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이 기도는 세상을 버리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기를 바라는 가장 깊은 소망입니다.

성도는 오늘도 끝을 향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사는 사람입니다. 종말은 무너짐의 시간이 아니라 회복의 시간이며, 심판의 날인 동시에 구원의 완성이 드러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그날이 오면 믿음은 눈으로 바뀌고, 눈물은 찬송으로 바뀌며, 기다림은 영광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소망 때문에 성도는 오늘도 깨어 살고, 거룩하게 살며,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선택합니다.

7월 셋째주 주일 오후 예배 대표기도문

  7월 셋째주 주일 오후 예배 대표기도문 영광과 존귀를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7월 셋째 주일 오후에도 주님의 백성들을 다시 예배의 자리로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을 붙드시고, 주일의 남은 시간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