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9일 목요일

[신앙 칼럼] 미움을 어떻게 해야 하나

 

미워하는 마음 앞에서

미움은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어두운 불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상처처럼 시작됩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억울한 일, 배신의 기억, 비교와 시기, 반복된 실망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지지 않으면 어느 순간 미움이 됩니다. 미움은 단순히 싫어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미움은 상대를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며, 그의 불행을 은근히 바라는 죄의 그림자입니다.

성경은 미움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요한일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실제 행동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마음속 미움이 이미 생명을 해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살인은 손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고, 내 상처와 분노의 대상으로만 볼 때, 우리는 이미 사랑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미움을 느끼는 모든 사람을 정죄 속에 가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연약한지 아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그저 잊어버려라”라고 가볍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시편에는 원통함과 분노와 탄식의 기도가 가득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미움을 품은 채 사람에게 폭발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분은 기도가 되고, 기도 속에서 미움은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적 원리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하지만,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십니다. 불의와 거짓과 폭력과 교만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도 죄에 대해 무감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죄를 미워하는 것과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다릅니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은 거룩으로 향하지만,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파괴로 향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이면서도, 동시에 죄인을 부르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감정적으로 원수를 좋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수 사랑은 죄를 덮어 주거나 불의를 묵인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원수 사랑은 복수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고,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며, 상대의 영혼까지 하나님의 긍휼 아래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원수 사랑은 성도의 도덕적 의지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미움을 이기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고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의 미움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도 용서받은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상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거리를 두고, 진실을 말하며, 정의로운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러나 용서란 내 마음의 재판석에서 내려와 최종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미움은 상대를 묶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묶습니다. 용서는 상대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미움의 감옥에서 풀려나는 은혜입니다.

성도는 미워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 분노가 만족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나는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사람 자체를 지워 버리고 싶은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께 판단을 맡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이 질문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미움을 이기는 길은 사랑을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받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긍휼을 입은 사람인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오래 참으셨고, 나를 버리지 않으셨으며,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으면 사람은 쉽게 미워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면 미움의 불길이 조금씩 낮아집니다.

성도의 마음에도 미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미움에 마음의 왕좌를 내어 주지 않습니다. 미움을 하나님께 가져가고, 십자가 앞에서 다루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과 용서의 길을 배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미움이 전혀 없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라, 미움을 품고도 하나님께 나아가 치유받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미움 앞에서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두운 마음까지 아시며, 그 마음을 말씀과 은혜로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미움이 있던 자리에 긍휼이 자라고, 복수심이 있던 자리에 기도가 자라며, 상처가 있던 자리에 십자가의 위로가 스며들 때, 성도는 조금씩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갑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굳은 마음을 만지시며 말씀하십니다. “미움에 너를 맡기지 말라. 너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신앙칼럼]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은 완성된 지도를 들고 떠난 사람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순종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떠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이 한 문장 안에 믿음의 깊은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길을 알고 걷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하나님을 알고 걷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과 안정과 익숙함이 있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익숙한 땅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때로 익숙함을 떠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단지 마음속의 동의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움직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생각에 머물지 않았고,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강조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는 목적지를 다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사람은 보통 확실한 조건이 있을 때 움직입니다. 손해가 없을 때, 길이 보일 때, 결과가 예측될 때 결단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계산보다 더 확실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길의 정보가 아니라, 그 길로 부르신 분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또한 나그네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는 그가 약속의 땅에 거류하며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 거했다고 말합니다(히 11:9).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그 땅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읍을 건설한 정착민이 아니라 장막을 치고 걷는 나그네였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단순히 땅의 소유를 향한 믿음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눈앞의 땅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더 큰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0절은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믿음의 깊은 중심입니다. 그는 가나안 땅만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성도의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땅이 전부라고 믿지 않습니다. 집을 짓고 일하며 사랑하고 책임을 감당하지만, 우리의 최종 본향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성도를 현실에서 도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며 살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기다리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자손을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을 가장 깊이 시험하는 시간입니다. 약속은 분명한데 현실은 움직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들었는데 상황은 여전히 메마를 때, 성도는 믿음의 밤을 통과합니다. 아브라함도 흔들렸습니다. 그는 언제나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연약함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이루셨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세워집니다.

사라는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사라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히 11:11). 믿음은 자기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은 쇠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끝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새 일을 이루실 수 있음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가장 깊은 절정은 이삭을 바치는 장면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말합니다(히 11:17).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삭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믿음이 단지 복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문제임을 보여 줍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보다 하나님을 더 붙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습니다(히 11:19). 이것은 부활 신앙의 씨앗과도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이 서로 모순되는 듯 보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모든 질문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능하시다는 사실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단지 한 가문의 번성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씨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본 약속의 깊은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지 고대 족장의 훌륭한 결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날을 멀리서 바라본 믿음입니다.

오늘 성도에게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길을 다 알고 살지 못합니다. 때로는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하고, 때로는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기다리며, 때로는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길이 보이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걷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황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떠났고, 믿음으로 거류했으며, 믿음으로 기다렸고,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그의 삶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한 사람의 여정으로 보여 줍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이며, 약속을 붙드는 기다림이며, 이해할 수 없는 자리에서도 순종하는 용기입니다. 성도는 아브라함처럼 오늘도 부르신 하나님을 따라 걷습니다. 그 길이 때로 낯설고 멀어 보여도, 그 길 끝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길을 다 알지 못해도 주님을 믿습니다. 약속이 더디 보여도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믿음으로 걷겠습니다.”

[신앙칼럼] 믿음으로 산다는 것, 히브리서 11장을 중심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막연한 낙관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함도 아니고, 마음만 강하게 먹으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자기 확신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보다 더 실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