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9일 수요일

마태복음 1:18-25 묵상,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된 구속: 예수의 탄생에 담긴 하나님의 뜻

마태복음 1장 18절부터 25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사로, 신약 전체를 여는 구속사의 첫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출생 기록을 넘어서,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또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역사 속에 어떻게 들어오셨는지를 선언하는 신학적 고백입니다. 마태는 매우 절제되고 간결한 표현으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드러내며, 구속사의 중심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1:18)

이 구절부터 우리는 성령, 순종, 말씀의 성취라는 키워드를 따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된 구속: 신성과 인성의 신비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 헬라어 원문은 Τοῦ δὲ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ἡ γένεσις οὕτως ἦν,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러하였다"입니다. 여기 사용된 γένεσις는 앞서 1장 1절에 등장한 "계보"의 단어와 동일하며, 이는 단순히 출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새 창조의 역사를 열어가십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태는 인간적인 방법이나 관계를 통해 예수께서 오신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합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ἐκ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는 구약 창조 기사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장의 혼돈 위를 운행하시던 성령께서 이제는 마리아의 태 속에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완전한 인성을 지니시되, 죄인의 혈통 안에서 잉태되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와 주권 아래 성결하게 오신 분임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류 구원의 근간이며, 이 땅의 모든 인간 구속이 사람의 능력이나 의도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의로운 자 요셉: 순종으로 응답하는 구속사의 통로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 요셉은 본문 속에서 매우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의로운 사람"(δίκαιος)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도덕적 성품이 아니라, 율법을 존중하면서도 은혜와 긍휼을 행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요셉은 율법에 따라 약혼녀의 임신을 문제 삼아 공개적으로 고발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의 형식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움을 택한 것입니다.

요셉의 이 결정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의 명예보다 마리아의 수치를 덜어주려는 사랑과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크고 놀라운 구속사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를 품고,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아의 법적 아버지가 되는 길입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요셉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 시대 하나님이 계시를 주시던 방식 중 하나이며, 구속사 속에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단지 도구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순종하는 신앙의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요셉은 그 말씀에 지체 없이 순종합니다. 이는 ‘말씀의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천사는 요셉에게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1절) — 예수라는 이름(Ἰησοῦς)은 히브리어 여호수아(יְהוֹשׁוּעַ)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의 사명이자 정체성입니다. 단지 구약의 또 다른 지도자가 아니라, 죄에서 백성을 구원하시는 참된 구속자,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마태는 이 사건이 이사야 7:14의 예언 성취임을 밝힙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 ‘임마누엘’(Ἐμμανουή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원래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남유다에게 주신 표적이었으나, 마태는 그것을 메시아적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임마누엘은 단지 위기의 순간의 위로가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이시며, 죄 가운데 있던 백성에게 ‘함께 하심’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회복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리아를 데려오고,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동침하지 않으며, 이름을 ‘예수’라 짓습니다. 그는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에 참여하는 인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계획을 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론

마태복음 1장 18절부터 25절까지는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통해, 성령의 역사, 말씀의 성취, 그리고 순종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속사의 개요와도 같은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구속을 시작하셨고, 말씀으로 그 구속을 설명하시며, 의로운 자 요셉을 통해 그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구속의 핵심이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죄와 연약함 속으로, 가장 낮고 조용한 방식으로 찾아오셔서, 죄인을 위한 구원을 시작하신 그 예수.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삶 가운데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인생의 계획과 두려움 속에서 요셉처럼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도하시는 구속사에 동참하는 길은 언제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1:17 묵상, 시간 속에 새겨진 언약의 질서

 

시간 속에 새겨진 언약의 질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맺으며

마태복음 1장 17절은 앞서 열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마무리하며, 하나의 구조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요약문이 아니라, 구속사의 흐름을 해석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질서와 섭리를 드러내는 선언적 구절입니다. 사람의 족보 같지만, 하나님의 설계 아래 짜여진 시간의 구조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언약의 완성으로 인도받습니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마 1:17)

이 구절은 계보의 단순 정리를 넘어, 세 시기 각각 14대라는 반복 구조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 속 질서와 구속사의 유기적 흐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한 수의 배열이 아닌, 구속사의 틀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패턴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조직된 세 구간의 구속사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세 시기로 나눕니다. 첫째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둘째는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셋째는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그리스도까지입니다. 각각 14세대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헬라어 표현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열네 대"에 해당하는 표현은 γενεαὶ δεκατέσσαρες로 반복됩니다. ‘세대들’을 뜻하는 γενεά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의 특정한 시대와 사람들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이 구조는 마치 세 단락으로 구성된 연대기적 설교처럼 족보를 해석하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는 언약의 기초가 세워지는 시기요,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는 인간의 타락과 언약에 대한 불성실로 인한 심판의 시기이며, 포로기 이후부터 예수까지는 회복과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마태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무질서한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구속을 위한 명확한 패턴과 흐름을 지닌 역사임을 설파합니다.

특히 숫자 ‘14’라는 반복은 히브리어 숫자 상징체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다윗(דָּוִד)의 자모값은 4(ד) + 6(ו) + 4(ד) = 14입니다. 다시 말해, 마태는 이 숫자를 통해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임을 상징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문자적 계산 이상의 신학적 상징으로, 예수께서 약속된 다윗의 후손, 곧 메시아이심을 반복적으로 각인시키는 장치입니다.

언약의 경륜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현실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세 시기로 나뉘는 이 족보는 단순한 시대 구분이 아니라, 언약의 경륜 안에서 반복되는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첫 시기인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세워지는 시기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민족이 형성되고, 다윗 안에서 정치적, 신앙적 중심이 마련됩니다.

둘째 시기,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는 언약 백성이 그 언약에 불순종하며 점차 타락하는 시기입니다. 왕들은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따르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절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통해 다시금 언약의 깊이를 깨닫게 하십니다. 바벨론 포로는 단순한 멸망이 아니라, 구속사의 ‘재조정’이자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셋째 시기,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그리스도까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무명의 시대입니다. 기록된 예언자도 없고, 위대한 신앙의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 침묵의 세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 시대에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어졌습니다. 스룹바벨, 아비훗, 아소르, 사독, 엘리아김... 이들의 이름은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이어가기 위해 선택하신 통로였습니다.

이처럼 마태는 14대씩 세 번의 구간을 통해 인간의 실패가 반복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무너지지 않으며,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시간의 마침표이자 구속사의 정점

마태는 이 구조적인 정리를 통해 구속사의 방향성과 중심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스도, 곧 예수는 단순히 14번째 이름이 아니라, 앞선 모든 계보가 기다리고, 예비하며, 가리키던 중심입니다. 이 족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수렴되며, 인류의 모든 시간과 역사는 이 이름 앞에 꺾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본문의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ἕως τοῦ Χριστοῦ —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이는 단순한 시간적 도달이 아니라, 구속사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구약의 시간은 예수를 향해 달려왔고, 이제 신약의 시간은 예수로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 새겨진 ‘완성’이며, 동시에 ‘새 시작’입니다. 이 족보의 구조는 그래서 단지 과거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모든 시대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인간의 역사에 예수가 오심으로 새로운 질서가 주어졌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족보,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계보에 접붙여지게 됩니다.

결론

마태복음 1장 17절은 단순한 계보 요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패턴을 보여주는 구조적 묵상이며,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정교하고, 질서 있고, 신실하게 흘러왔는지를 조명하는 설교적 선언입니다. 14대씩 세 구간으로 구성된 이 구조는 다윗의 이름 속에 감춰진 메시아적 상징을 드러내고, 세대의 흐름 안에 반복되는 인간의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인내와 은혜를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족보의 정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분은 시간을 거슬러 내려온 언약의 열매이자, 새로운 피조물의 시작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과거의 족보가 끊기고, 새로운 계보, 곧 하늘의 족보에 기록된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시간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듯 제 삶의 중심도 예수님이 되게 하소서. 구속사의 완성자 되신 그리스도 안에 저도 속하게 하소서.”

마태복음 1:12-16 묵상, 포로 이후의 족보에 담긴 구속의 은밀한 진행

 

침묵의 시대, 은혜는 이어진다: 포로 이후의 족보에 담긴 구속의 은밀한 진행

마태복음 1장 12절부터 16절까지는 바벨론 포로 이후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족보의 마지막 구간입니다. 이 부분은 구약 성경이 침묵한 시기, 이른바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의 인물들이 포함된 구간으로, 성경의 기록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태는 이 이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바늘을 한 순간도 놓지 않으셨음을 증언합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 1:12-16)

이 족보는 알려진 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명의 인물들을 통해 은혜가 어떻게 일상과 역사 속을 뚫고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고요하지만 심오한 구속사의 행진입니다.

스룹바벨에서 요셉까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

이 구절은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스룹바벨은 구약 성경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바벨론 포로 이후 유다로 귀환한 지도자 중 하나였습니다(학 1:1, 슥 4:6-10). 그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주도하며 영적 회복의 상징이 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등장하는 사람들, 아비훗부터 요셉까지는 구약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며 자연스레 질문하게 됩니다. 왜 이처럼 성경에 아무 정보도 없는 인물들이 예수님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는 인간의 인지도나 공적에 의해 기록되지 않으며, 은밀히 그러나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 아래 진행된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종종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아비훗, 엘리아김, 아소르, 사독, 아킴, 엘리웃 등은 성경 본문에서 그 어떤 사역이나 사건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매개체로 쓰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침묵기 속에서도 언약을 붙들고 살아간 ‘신실한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이 계보에서 쓰인 "낳고"라는 단어 ἐγέννησεν은 앞서 다룬 바와 같이 혈통적 계승의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표현하는 표현입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의미 없는 인생이 아니며, 하나님의 구속계획 안에서는 무명의 순종도 하늘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침묵의 시대, 말씀은 여전히 진행된다

마태는 이 계보를 통해 중간기 약 400년 동안의 역사를 요약합니다. 이 시기는 예언자도 없고, 계시도 멈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시간표는 정확히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 개념, 곧 카이로스(kairos)적인 시간 이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연대기 속에 매이지 않습니다. 침묵의 400년은 단절이 아니라, 다듬고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보는 마침내 ‘요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 이 구절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전환을 목도합니다. 이제까지는 모든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후손을 ‘낳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여기서는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으로 표현됩니다. 헬라어 문장 구조에서도 ἐγέννησεν이 더 이상 요셉에서 예수에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는 요셉이 낳은 아들이 아닙니다. 마태는 분명히 말합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

이는 동정녀 탄생의 신비를 암시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인간 혈통의 연속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는 결정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유일하게 ‘에게서’라는 여성 중심 표현으로 예수와 연결되며, 모든 계보가 예수 안에서 종결되고, 동시에 완성됩니다.

족보의 절정, 언약의 성취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마태는 이 족보의 마지막 절정에서 그동안의 모든 ‘낳고’의 반복을 멈추고,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라는 고백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는 단순한 인명 언급이 아니라, 마태복음 전체의 신학을 압축한 선언입니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과 기대의 성취자가 예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방 민족에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다윗의 자손으로서 영원한 왕권을 이어가는 참 왕이십니다. 또한 침묵 속에서도 이어진 계보의 완성으로, 하나님께서 결코 언약을 잊지 않으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산 증거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인간의 역사 속에 침투하신 하나님의 구속입니다. 그래서 이 족보의 마지막에서 마태는 더 이상 누구를 ‘낳았느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계보가 멈추고, 예수 안에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족보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속사적으로 볼 때 ‘구약의 계보’는 여기서 끝이 나고, ‘신약의 백성’은 예수로부터 시작된다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결론

마태복음 1장 12절에서 16절은 족보의 마지막 구간이자, 구속사의 새로운 시작점입니다. 스룹바벨 이후의 무명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며,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는 선언은 이제까지의 모든 구약 언약이 한 인물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핵심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꼭 드러나야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사람들, 기록되지 않은 인생을 통해도 구속사를 성실히 이어가십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구속사는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침묵의 시대를 지나도, 이름 없이 사는 삶의 자리를 지나도,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보를 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저도 주님의 족보에 속한 자입니다. 저의 작은 순종도,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은혜의 계보를 이루는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1:2-6 묵상,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 언약의 계보, 구속의 뿌리

신약의 문을 여는 마태복음은 단순한 족보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과 사람을 통해 짜오신 구속사의 씨줄과 날줄을 드러내는 계시입니다. 마태복음 1장 2절에서 6절 상반부까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에 이르기까지의 족보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역사 속에 구체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신학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다윗을 낳으니라." (마 1:2-6상)

이 족보는 단지 혈통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맥을 따라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죄와 허물, 실패와 반역조차도 끌어안으며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약속의 계승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계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약속으로 출발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며, 그를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오롯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이며,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언약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함으로써, 메시아의 오심이 이 언약의 성취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여기서 쓰인 헬라어 동사 ἐγέννησεν (egenēsen)은 능동형으로, 단순히 출산의 의미만이 아닌, 계보상 후손을 낳았다는 전통적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 이삭을 주신 사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인간의 가능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근거함을 보여줍니다.

이삭에서 야곱, 야곱에서 유다로 이어지는 계보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격을 넘어 선택으로 역사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삭은 이스마엘보다, 야곱은 에서보다, 유다는 요셉보다 선택받았습니다. 선택의 원리는 인간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유다는 넷째 아들이었고, 여러 실수와 불의가 있었지만 메시아 계보를 이었습니다. 이는 구속사는 도덕적 자격이 아니라 은혜의 선택임을 선포합니다.

죄 많은 사람들 속에 흐르는 구속의 실타래

이 계보에 나열된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각 인물들은 완전한 신앙인이 아니라 오히려 연약하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선택을 한 이들이 많습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족보 속에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마저도 구속사 속에 사용하시는 은혜의 증거입니다.

다말, 라합, 룻은 이방 여인이며, 사회적으로 주변인으로 간주되던 여성들입니다. 라합은 기생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으며, 다말은 며느리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메시아의 계보를 이루는 결정적 인물들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특정한 민족이나 계층, 도덕성에 갇히지 않고, 모든 민족과 인생의 경계 너머로 확장되는 보편적 구속임을 나타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 이 표현에서 헬라어 ἐκ (ek, ~에게서)은 단순한 출산의 표현을 넘어 출신과 정체성을 함께 내포합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이방 여인들의 이름을 넣어, 복음의 보편성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경건한 혈통과 완벽한 계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인과 이방인, 잊힌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속의 드라마입니다.

다윗, 왕으로서의 언약 성취의 지점

마태는 이 계보의 첫 번째 중요한 전환점을 "다윗"에서 맞이합니다. 6절은 말합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여기서 유일하게 이름 앞에 직함이 붙습니다. "다윗 왕". 이는 단순한 정체성 언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후손 중에서 영원한 왕위를 이어갈 자가 나올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는 다윗을 메시아 계보의 중심으로 세움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의 성취자, 즉 참된 다윗의 자손임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다윗 왕을 낳으니라"는 말은, 인간 왕조의 이상이 이제 메시아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로 이어진다는 선언입니다. 다윗의 왕권은 죄로 인해 쇠퇴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통치로 회복됩니다. 구속사의 흐름은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은혜로 나아가게 되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결론

마태복음 1장 2절에서 6절 상반부까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족보는 단순한 가계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가 어떻게 인간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 족보는 인간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과 신실하심을 드러내며, 죄와 허물 가운데서도 구속사를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구속의 계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을 쓰신 하나님, 유다와 다윗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인생 가운데서 구속의 계보를 이어가고 계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실패를 뛰어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 계보 안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하며, 우리 삶 또한 그분의 구속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 묵상 예수님의 족보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름 속에 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신약성경의 서문이자, 구속사의 핵심 주제를 응축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 짧은 문장은 단순히 한 사람의 족보를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구약의 언약 구조 속에서 해석하도록 독자를 초청하는 선언입니다.

족보의 시작, 복음의 시작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곧 복음을 시작하면서 복음서 최초의 문장을 "계보"로 시작합니다. 이 "계보"(헬라어: biblos geneseos)는 창세기(Genesis)를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단순한 혈통 기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작을 암시합니다. 이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두 인물, 아브라함과 다윗은 각각 구속사의 두 기둥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인물입니다.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창 12:3)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따라서 마태는 예수가 단지 유대인의 왕일 뿐 아니라, 열방을 위한 구속주라는 점을 족보 서두에서부터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스라엘의 이상적 왕이자, 메시아의 표상이 된 인물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 언약을 성취하신 분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단순한 가계도가 아니라, 구속사의 성취를 선언하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름에 담긴 구속사적 메시지

히브리 문화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정체성과 사명을 드러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어형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1장 21절에서 천사의 말을 인용하여 이 이름의 의미를 밝힙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의 이름은 그분의 존재 목적, 곧 죄에서의 구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헬라어: Christos, 히브리어: Mashiach)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 칭호는 예수의 공적 사역, 특히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1장 1절에서부터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자 전 인류를 위한 구속자라는 점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계승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마태는 이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이어져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창 12장), 다윗에게 주신 언약(삼하 7장), 그리고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임마누엘(사 7:14)의 약속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끝까지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특히 바벨론 포로 시기는 이 족보 가운데 단절처럼 보이지만, 마태는 그 안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흐르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가 인생의 절망과 침묵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속사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합니다.

결론

마태복음 1장 1절은 단순한 소개 문장이 아니라, 구약의 언약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으로부터 이어져 온 언약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루며, 그 이름 속에는 인류 구속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내듯 이어져 왔고, 오늘날 우리 또한 그 계보의 연장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족보를 묵상할 때, 우리는 단순한 과거 이야기를 넘어서서,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긴 구원의 복음이 우리의 삶을 견인하고 있음을 믿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하-11절 솔로몬부터 바벨론포로까지

 

인간 왕조의 영광과 몰락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하심

마태복음 1장 6절 하반절부터 11절까지는 다윗의 후손들, 곧 이스라엘의 왕들이 등장하는 구간입니다. 이 부분은 한 나라의 정치사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역사기록을 넘어, 언약 백성의 타락과 심판, 그리고 여전히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와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구속사적 실루엣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저버리지 않으시며, 때로는 심판을 통해 정결케 하시고, 다시금 그분의 구속계획을 이어가십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마 1:6하~11)

이 구절은 다윗 왕조의 시작에서부터 바벨론 포로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영광과 몰락이 교차하는 시기를 다루며, 그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다윗의 죄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 마태는 여기서 놀라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보통 족보에서는 아내의 이름을 언급할 때, 남편의 이름과 함께 명시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굳이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 ‘우리아의 아내’라고 표현함으로써, 다윗의 죄를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이는 구속사의 계보 속에 인간의 부끄러운 과거가 삭제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서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표현 ἐκ τῆς τοῦ Οὐρίου는 단지 출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아에게 속했던 여자’라는 의미로서, 아직까지도 그녀가 원래 누구의 아내였는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를 숨기지 않으시고, 그 위에 은혜를 덧입히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회개하였고, 그 죄의 자리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이 이어집니다. 이 장면은 구속사가 죄 없는 이들만의 연대가 아니라, 회개한 죄인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언입니다.

왕들의 연대, 실패와 반역 속에서도 흐르는 언약의 맥

솔로몬에서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요람,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고냐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왕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이들의 생애를 구약의 열왕기와 역대기를 통해 살펴보면, 일부는 경건했으나 대부분은 악행을 저질렀고, 우상숭배와 백성의 타락을 조장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계보는 끊기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 가장 타락한 왕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위협 앞에서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고, 성전의 구조를 바꿔버릴 정도로 하나님의 예배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제거하지 않으시고 히스기야라는 신실한 아들을 주셔서 왕조를 이어가십니다.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을 통해 우상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시킨 왕이었습니다. 그의 개혁은 아버지의 죄악을 씻어내는 정결의 상징이었으며, 이는 구속사 속에서 ‘남은 자’를 통한 회복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늘 남은 자를 통해 당신의 약속을 보존하시며, 이 계보 안에서도 이 원리는 반복됩니다.

므낫세는 다시 최악의 죄를 저지르며 유다를 영적으로 황폐화시켰고, 요시야는 다시 신앙개혁을 이끕니다. 이처럼 마태가 나열하는 이 족보는 선과 악, 회복과 타락이 교차하는 흐름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이 결코 꺾이지 않고 흐르고 있음을 증언하는 구속사의 흐름입니다.

바벨론 포로, 심판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

이 족보의 절정은 여고냐와 그 형제들, 그리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라는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심판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케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마태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헬: ἐπὶ τῆς μετοικεσίας Βαβυλῶνος)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이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포로가 아니라, 신학적 전환점임을 강조합니다. ‘메토이케시아’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정착지의 상실과 함께 삶의 근거가 무너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동시에 언약의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정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여고냐는 예레미야서에서 '자식 없는 자', '절대로 번성하지 못할 자'로 선포된 바 있습니다(렘 22:30).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끊지 않으시고, 이후 그의 후손인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을 통해 계보를 이어가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 중에도 새로운 싹을 틔우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바벨론 포로는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한 ‘리셋’이었습니다.

이 계보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죄악과 역사 속의 고난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빛나는 방식으로 성취되어 갑니다.

결론

마태복음 1장 6절 하반절부터 11절까지는 다윗 왕조의 영광과 타락, 회개와 회복, 그리고 심판과 정결의 드라마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속사의 거울입니다. 이 족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와 신실하심, 그리고 회개한 자를 다시 쓰시는 은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다윗의 죄처럼 부끄러운 과거가 있을 수 있고, 므낫세처럼 하나님 앞에 죄악을 쌓아 놓았던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흐름 속에서도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바벨론 포로처럼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질 때조차도, 하나님은 새 출발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보 속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계보는 완전한 사람들의 기록이 아니라, 은혜에 붙들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그 계보에 속한 자로서, 그분의 신실하심을 붙들며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1:18-25 묵상,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된 구속: 예수의 탄생에 담긴 하나님의 뜻 마태복음 1장 18절부터 25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사로, 신약 전체를 여는 구속사의 첫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출생 기록을 넘어서,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