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대, 은혜는 이어진다: 포로 이후의 족보에 담긴 구속의 은밀한 진행
마태복음 1장 12절부터 16절까지는 바벨론 포로 이후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족보의 마지막 구간입니다. 이 부분은 구약 성경이 침묵한 시기, 이른바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의 인물들이 포함된 구간으로, 성경의 기록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태는 이 이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바늘을 한 순간도 놓지 않으셨음을 증언합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 1:12-16)
이 족보는 알려진 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명의 인물들을 통해 은혜가 어떻게 일상과 역사 속을 뚫고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고요하지만 심오한 구속사의 행진입니다.
스룹바벨에서 요셉까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
이 구절은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스룹바벨은 구약 성경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바벨론 포로 이후 유다로 귀환한 지도자 중 하나였습니다(학 1:1, 슥 4:6-10). 그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주도하며 영적 회복의 상징이 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등장하는 사람들, 아비훗부터 요셉까지는 구약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며 자연스레 질문하게 됩니다. 왜 이처럼 성경에 아무 정보도 없는 인물들이 예수님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는 인간의 인지도나 공적에 의해 기록되지 않으며, 은밀히 그러나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 아래 진행된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종종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아비훗, 엘리아김, 아소르, 사독, 아킴, 엘리웃 등은 성경 본문에서 그 어떤 사역이나 사건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매개체로 쓰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침묵기 속에서도 언약을 붙들고 살아간 ‘신실한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이 계보에서 쓰인 "낳고"라는 단어 ἐγέννησεν은 앞서 다룬 바와 같이 혈통적 계승의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표현하는 표현입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의미 없는 인생이 아니며, 하나님의 구속계획 안에서는 무명의 순종도 하늘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침묵의 시대, 말씀은 여전히 진행된다
마태는 이 계보를 통해 중간기 약 400년 동안의 역사를 요약합니다. 이 시기는 예언자도 없고, 계시도 멈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시간표는 정확히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 개념, 곧 카이로스(kairos)적인 시간 이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연대기 속에 매이지 않습니다. 침묵의 400년은 단절이 아니라, 다듬고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보는 마침내 ‘요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 이 구절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전환을 목도합니다. 이제까지는 모든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후손을 ‘낳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여기서는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으로 표현됩니다. 헬라어 문장 구조에서도 ἐγέννησεν이 더 이상 요셉에서 예수에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는 요셉이 낳은 아들이 아닙니다. 마태는 분명히 말합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
이는 동정녀 탄생의 신비를 암시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인간 혈통의 연속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는 결정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유일하게 ‘에게서’라는 여성 중심 표현으로 예수와 연결되며, 모든 계보가 예수 안에서 종결되고, 동시에 완성됩니다.
족보의 절정, 언약의 성취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마태는 이 족보의 마지막 절정에서 그동안의 모든 ‘낳고’의 반복을 멈추고,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라는 고백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는 단순한 인명 언급이 아니라, 마태복음 전체의 신학을 압축한 선언입니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과 기대의 성취자가 예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방 민족에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다윗의 자손으로서 영원한 왕권을 이어가는 참 왕이십니다. 또한 침묵 속에서도 이어진 계보의 완성으로, 하나님께서 결코 언약을 잊지 않으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산 증거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인간의 역사 속에 침투하신 하나님의 구속입니다. 그래서 이 족보의 마지막에서 마태는 더 이상 누구를 ‘낳았느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계보가 멈추고, 예수 안에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족보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속사적으로 볼 때 ‘구약의 계보’는 여기서 끝이 나고, ‘신약의 백성’은 예수로부터 시작된다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결론
마태복음 1장 12절에서 16절은 족보의 마지막 구간이자, 구속사의 새로운 시작점입니다. 스룹바벨 이후의 무명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며,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는 선언은 이제까지의 모든 구약 언약이 한 인물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핵심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꼭 드러나야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사람들, 기록되지 않은 인생을 통해도 구속사를 성실히 이어가십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구속사는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침묵의 시대를 지나도, 이름 없이 사는 삶의 자리를 지나도,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보를 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저도 주님의 족보에 속한 자입니다. 저의 작은 순종도,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은혜의 계보를 이루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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